'다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안수정
건강한 사람의 몸에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항체를 만들기 위해 몸속에서 여러 가지 작용이 일어난다. 인체가 그에 대한 방어를 하지 못하면 건강에 이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과는 다른 존재가 출현했을 때 나타나는 거부 반응과 공격은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 작용일지도 모른다. 면역체계가 항원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처럼 사회체제는 질서와 안정을 파괴하는 낯선 것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 『해피피트』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지도자 노아와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일반 대중, 그리고 이들과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멈블이 등장하는 펭귄 사회를 주 무대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누구나 하트송을 가진 평범한 펭귄 집단 속에 하트송을 갖지 못한 멈블이 탄생하면서 시작된다. 자신의 춤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자 하는 멈블은 그 사회 속에 등장한 이질적 개체이며 용인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거부반응과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전체의 믿음을 담보로 무리 위에 군림하는 노아는 당연히 멈블의 몸짓, 발짓 하나하나를 불경한 것으로 여긴다. 나아가 물고기 기근의 원인을 멈블의 탓으로 돌린다. 아버지 멤피스 역시 절대로 알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펭귄 사회의 금기를 어긴 죄책감으로 자신의 아들 멈블이 일반 펭귄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크게 상심하여 멈블에게 책임이 있다는 입장에 선다.
노아와 그를 따르는 펭귄들은 권력과 다수라는 입장에서 반대편에 있는 멈블을 약자로 만든다. 멈블의 사회는 멈블을 사회에 혼란을 주는 몹쓸 바이러스로 인식한 셈이다. 자신의 사회를 지켜야 하고, 멈블이 대량으로 복제되거나 다른 펭귄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멈블은 집단을 교란시키거나 공격하는 외부 침입 바이러스가 아니다. 멈블은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집단의 위기로 떠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아남으려 한다. 거짓을 진실로 위장하여 어리석은 대중에게 절대적 믿음과 복종을 요구하는 또 다른 펭귄 사회의 지도자 러브레이스의 부적, 갈매기의 발에 채워진 플라스틱 등을 단서로 자신의 사회 전체가 지지하고 진실이라 여기는 믿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대양 너머 인간 세계로 나아가게 되고, 그 곳에서 펭귄사회의 믿음이 허상이었음을 목도한다.
멈블은 집단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힘에 대해 오직 춤과 용기로 맞설 뿐이다. 기필코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는 그가 속한 사회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한 멈블을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처럼 여기는 시각은 도리어 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자기 뼈의 연골을 항원으로 인식해서 공격하면 연골세포가 파괴되면서 관절이 시리거나 아픈 증상이 발생하는 류머티즘의 증상과 같이 멈블의 사회는 멈블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과 자신의 편을 구분 못하고 억압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는 펭귄들의 춤은 더욱 의미가 깊다. 이는 맹목적 신념에 의해 마비된 이성의 회복을 돕는 경쾌한 몸짓이며, 갈등 관계에 있던 아버지와 지도자, 인간과의 소통과 화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감동은 대립하던 어느 한쪽의 승리나 패배가 아닌 서로 다른 입장의 화해와 공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도 현실 문제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우리 사회는 건강한 멈블의 춤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바이러스로 인식하고 공격하지 않는지, 노래를 못한다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노래 한 곡 해!'를 강요하는 회식 문화를 당연시 여기며 음치를 비웃고 있지 않는지. 영화의 달콤한 결말이 가져다주는 행복감 뒤에 쓸쓸한 여운이 남는다.
편견에 빠진 우리 사회가 '다름'을 대하는 자세는 이 영화를 본 후에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면역력을 키우는 예방주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강은교 시인의 시 <사랑法>의 형식을 빌려 '노래하고 싶은 자 노래하게 하고 춤추고 싶은 자 춤추게 하는 사회'를 꿈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