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할 줄 몰랐던 우리의 통념을 의심하라
불통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사고가 그 집단을 지배하는 통념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위와 결합하여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그 집단의 삶의 질서와 다른 삶의 방식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배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은 곧 기존의 질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해피 피트의 멈블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멈블은 하트송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황제펭귄 집단의 지배적 통념 대신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탭댄스로 소통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리에서 가장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된 멈블은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비하하거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는 대신 무리 밖으로 나가 새로운 존재들을 만난다. 발찌를 한 갈매기, 아들러 펭귄 친구들과 이상한 고리를 목에 건 러블레이스 등등.
이러한 만남을 통해 멈블은 황제펭귄 집단의 지배적 통념이 그릇되었음을 인식한다. 사이비 종교 교주 같은 러블레이스를 통해 노아가 갖고 있는 권위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깨닫고, 그의 목에 걸린 이상한 고리를 통해 자신들의 세계 외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멈블은 위기에 처한다. 노아는 멈블이 외국인(아들러 펭귄)들을 데려와 자신들의 집단을 위기에 빠뜨렸고, 자신들이 겪는 기근의 원인이 멈블의 불경한 춤에 있다며 멈블을 추방한다.
멈블의 추방은 펭귄 세계와 인간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멈블의 등장은 인간의 통념을 깨는 큰 사건이 된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갈매기의 발찌, 침몰하는 포크레인, 러블레스의 목걸이 등을 통해 인간의 힘이 남극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횡포는 포경선이 있던 항구의 황폐한 모습, 거대하고도 앙상하게 남은 고래의 뼈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그 절정은 동물원에 갇혀 미쳐가는 멈블의 모습이다.
인간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 인식해 왔다.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권위적 통념이었기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리석기 짝이 없고,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사고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환경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는 결국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로 나타났다. 영화 속에서 무너져 가는 거대한 빙하는 인류가 발전시켜온 문명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난 멈블은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세상의 하부구조에 속하는 한낱 펭귄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주장과 펭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주장이 부딪친다. 격론 끝에 인간들은 남극에서의 어획을 금지하였고, 펭귄들은 다시 평화롭게 산다.
남극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 땅의 주인은 펭귄이다. 인간은 외계인이고 침입자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마구잡이식 어로 활동은 펭귄에 대한 약탈이다. 우리의 오만한 시선은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들의 옆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인간과 펭귄이 소통하는 길이고 더 나가서는 자연과 소통하는 길이다.
멈블은 먼 길을 다녀옴으로써 자신의 집단이 갖고 있는 지배적 통념을 깼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무리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멈블은 영화 속 주인공이니까 영웅이 되어 자신의 무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잘못된 질서에 저항하다 처절히 패배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갔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통념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가?
인간은 싸우기라도 하지만 자연은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은 당하기만 하지 않는다. 전 지구적 질서를 깨는 인간의 무지막지한 개발은 인류 전체의 존망을 결정지을 수 있는 무서운 자연의 복수로 돌아오고 있다. 자연이 인간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고 있는지는 후쿠시마를 강타한 쓰나미, 태국의 홍수, 세계 곳곳에 나타나는 이상기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항상 먼 길을 돌아야만 하는가? 이성의 힘을 자랑하는 인간이 왜 잘못된 통념에 사로잡혀 진실을 보지 못하가? 어찌하여 너무도 처참한 결과가 눈앞에 펼쳐져야 땅을 치며 후회하는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유연해져야 한다. 나와 다른 존재가, 나와 다른 생각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의심할 줄 몰랐던 우리의 인식의 틀을 점검해야 한다. 만약 내 인식의 틀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깨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happy feet'를 불경한 것이고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노아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