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잠든 멈블을 깨울 것
언제부터인가, 슬픈 영화는 보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슬픈 일이 너무나 많기에 굳이 영화까지 보며 슬프고 싶지 않은 탓이다. 행복한 영화 속에서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이다. 비록 현실과 달리 너무도 쉬운 영화 속 행복이 아쉬울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해피 피트’라는 행복한 제목의 이 영화 역시 판타지라는 점에서는 그러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저 눈감아 버릴 수만은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어딘가를 연신 콕콕 찔러대는 것이다.
물고기와 노래만 있으면 행복한 펭귄 마을. ‘마음속에 노래를 주시고 배 속에 고기를 주시는 귄님’을 찬양하며 길고도 추운 겨울밤을 펭귄들은 노래로 이겨낸다. 유난히 혹독했던 어느 겨울에 멤피스는 품던 알을 떨어뜨렸다. ‘절대로 품고 있는 알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모든 것들의 정점에 있는 금언을 어긴 그는 그해 겨울 가장 열렬히 노래한 펭귄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멈블은 남들보다 늦게 남들과는 다르게 태어났다.
도그마와 터부로 지배되는 사회. 금기를 어기고 태어난 그가 그 사회의 지배질서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트송’이 없는 펭귄은 펭귄이 아닌 사회에서 노래 대신 춤을 가지고 태어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마음껏 춤추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멈블. 그의 마음속에 싹트고 자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은 낡은 세계를 바꾸어 낼 혁명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멈블의 춤이 그 사회에 받아들여져 지배질서를 위태롭게 할까 봐 두려운 지배세력들은 물고기가 줄어드는 위기를 그의 탓으로 돌려 그를 추방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멈블에게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물고기가 없어지는 원인을 찾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멈블은 외계인이라는 인간의 존재를 찾아내고, 춤으로 그들과의 소통에 성공함으로써 펭귄 마을을 위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물고기도 돌아오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펭귄들의 새로운 세계는 다양성의 인정과 자유, 소통, 평등의 가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사회였다. 맹목적 신앙숭배와 권위적 지배질서에 의해 개인이 억압받는 전체주의 사회는 멈블의 발짓에 의해 깨진 것이다. 이렇게 멈블은 고난의 운명을 타고나 외로움을 벗하며 성장하고, 모험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였으며 혹독한 시련을 이기고 돌아와 낡은 질서를 깨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자를 영웅이라 부른다.
아직도 사람들은 영웅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대사회에는 한 사람의 슈퍼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멈블들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멈블을 멈블이게 한 것은 자신에 대한 긍정과 권위나 위협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당당함, 그리고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한 때는 멈블이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안다. 하지만 내 안의 멈블을 어찌했는가. 내가 사람들과 다를 때 그 다름을 부끄러워하며 남과 같아지려고 하는 순간에, ‘아니오’라고 하고 싶지만 남들 때문에 ‘네’라고 하는 순간에, 가야할 길이 험난하다는 이유로 돌아선 바로 그 순간에, 길의 끝에 서서 내가 막아야 할 것들을 위해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그런 순간에 멈블은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렇게 멈블은 오랜 시간 잠들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억, 멈블을 외면했던 기억이 멈블을 깨우라고 나를 콕콕 찔러댔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할 것인가? 또 다시 눈을 감을 것인가, 아니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멈블을 깨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