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Search
Start
Get Cookie : ASDHFASDJK_naramal_so
Cookie Exist
0001-01-01 00:00

End
전국국어교사모임 바로가기



글쓰기강좌
 

제목
[3모둠] 해피피트 감상글 4차
조회 11
회원이미지이행섭
2011-11-05 15:53:24
제목 : 지배하는 말과 소통하는 말
 3모둠 이행섭(대전지족고)
펭귄들은 매트릭스에 살고 있다. 눈이 있으나 내 눈이 아니고, 입이 있으나 자신의 말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입되고, 교육으로 강화되며, 주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 받으며 길들여진다. 지배자의 언어에 중독된 뇌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곳에 자신만의 언어인 ‘춤’으로 말하는 멈블이 태어났다. 펭귄 공동체는 멈블을 전통과 질서에 도전하는 문제아로 규정한다. 공동체의 언어인 노래를 배우지 못하고 금기인 춤을 자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멈블은 교사를 절망하게 하고 부모에게 깊은 근심거리가 된다. 공동체 원로인 노아는 멈블의 춤이 펭귄신의 뜻에 거역하는 행위고 그 때문에 물고기 기근으로 공동체에도 재앙이 왔다고 규정한다. 노아는 멈블을 외부 세계로 추방한다.
지배자의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멈블은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멈블은 공동체를 벗어나 춤을 재능으로 인정하는 다른 펭귄 친구들과 예언자 러브레이스를 만난다. 러브레이스는 사이비 예언자로 권세를 누리지만 사실은 인간이 남극에 남긴 폐기물 때문에 목이 졸리는 고통을 당하는 자다. 이를 본 멈블은 외계인(인간)의 존재를 확신하고 찾아 나선다.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남극의 항구, 언덕 위의 초라한 교회와 거대한 공장의 폐허. 이 장면은 러브레이스가 사이비 종교적 지도자이면서 물질문명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멈블은 권력자의 거짓 이데올로기를 깨닫는다.
멈블은 거대한 어선을 쫓아 인간의 땅까지 간다. 수족관에 갇혔으나 한 소녀가 춤추는 재능을 알아보면서 그는 인간 세상에 화제가 된다. 멈블은 무전송신기를 등에 매달고 남극 고향에 돌아온다. 노아를 비롯한 원로들은 여전히 그를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지만, 멈블은 남극의 ‘물고기가 줄어드는 진짜 이유는 외계인 때문이며 그들은 펭귄들의 춤에 반응하며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는 체험한 진실을 전한다. 공동체의 펭귄들은 멈블을 따라 춤을 추고, 헬리콥터를 타고 인간이 나타나자 원로 지배자들도 함께 춤을 춘다. 펭귄들의 집단적인 춤은 인간 세계에 방송되며 남극의 환경파괴에 대한 논쟁이 불붙는다. “펭귄은 날 수 없는 새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펭귄 없는 세상은 싫소.”라는 주장이 대규모 환경 운동의 현장 사진과 함께 빠르게 제시된다. 결국 남극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다시 돌아왔고, 펭귄 마을은 수백만의 펭귄 무리가 번성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멈블의 춤은 해방의 언어다. 춤은 공동체 지배자의 억압에서 그 자신을 해방시켰고, 동시에 공동체 구성원들을 각성시켰다. 멈블은 마을의 낮은 곳과 동굴에서 말하고 함께 춤췄다. 노아나 러브레이스가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노래는 삶의 목적이며 펭귄신의 명령이라는 지배자의 거짓 이데올로기가 폭로되며 펭귄들은 허위의식에서 해방된다.
한편 멈블의 춤은 더 고차원의 세계에 사는 존재인 인간과 소통하는 언어이다. 이 소통은 평등한 소통이 아니다.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의사소통의 모습에 가깝다. 이것은 우리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게 한다. 멈블이 경험한 인간 세계는 진실의 아주 작은 단편일 것이다. 멈블은 인간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멈블은 최선을 다해 인간과 소통을 시도했고 인간들은 그의 간절한 마음에 반응했다. 펭귄들은 식량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고 춤추며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들의 뜻을 이루었다.
멈블이 인간과 자신의 공동체를 설득한 힘은 미지의 세계와 두려움 없이 소통한 용기와 열정, 낮은 자들에게 거짓 없이 평등하게 다가가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라. 그리고 겸손하게 세상과 소통하라.
 
 별4개     2011-11-05 20:49    
선생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글이 좀더 확신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지배의 말과 소통의 말을 제목으로 하기에는 잘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기성의 언어와 새로운 언어의 갈등으로 풀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성의 언어인 노래는 지배적 속성과 함께 소통의 속성을 모두 갖고 있거든요. 이질의 언어인 춤의 등장으로 인한 문화의 변화를 주목하며 풀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별4개  회원이미지최시한  2011-11-05 21:20    
멈불의 춤이 해방의 언어이면서 소통의 언어라는 데까지 이르렀군요. 그 양면을 함께 본점이 참 좋습니다.
춤이 언어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씨니피에를 지닌 씨니피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씨니피에를 '해방'과 '소통'이라고 보신 셈인데, 정재운 선생님의 지적에서 암시되는 대로, '지배'의 대립어로 '해방'은 적절해도 '소통'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멈불의 춤이 소통의 기호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까요? 저는 그런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멈불의 춤은 '해방'인 동시에 '소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펭귄과의 사이에서는 '해방', 인간과의 사이에서는 '소통'으로, 춤의 의미를 관계별로 나눈 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선생님, 우리는 결국, 영화를 분석하고 글의 짜임새를 궁리하다가, 사유의 고원에 이르렀습니다. 이 고원에서, 먹을 것도 자라지 않고 별로 아름다울 것도 없는 이 황량한 고원에서, 우리는 비로소 명징한 그 무엇에 다가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별4개  회원이미지이행섭  2011-11-09 13:27    
고맙습니다.
영화 감상글 쓰기를 통해서 삶과 세상을 보는 서로 다른 시선들이 만나는 신선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읽는 수준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그 수준과 상관없이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독특한 사유의 세계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분들을 만난 것이 새삼 놀랍습니다.
영화를 보는 안목이나 생각을 일관되게 밀고나가는 힘이나 글을 쓰는 솜씨나, 어느 것도 제가 발전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전보다는 글을 써보고 싶고, 내 생각을 글을 통해 다듬고 싶습니다. 잠든 정신을 깨워주신 최시한 선생님과 3모둠 선생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 0 / 2000자 ) ( 최대 2000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