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배하는 말과 소통하는 말
3모둠 이행섭(대전지족고)
펭귄들은 매트릭스에 살고 있다. 눈이 있으나 내 눈이 아니고, 입이 있으나 자신의 말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입되고, 교육으로 강화되며, 주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 받으며 길들여진다. 지배자의 언어에 중독된 뇌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곳에 자신만의 언어인 ‘춤’으로 말하는 멈블이 태어났다. 펭귄 공동체는 멈블을 전통과 질서에 도전하는 문제아로 규정한다. 공동체의 언어인 노래를 배우지 못하고 금기인 춤을 자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멈블은 교사를 절망하게 하고 부모에게 깊은 근심거리가 된다. 공동체 원로인 노아는 멈블의 춤이 펭귄신의 뜻에 거역하는 행위고 그 때문에 물고기 기근으로 공동체에도 재앙이 왔다고 규정한다. 노아는 멈블을 외부 세계로 추방한다.
지배자의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멈블은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멈블은 공동체를 벗어나 춤을 재능으로 인정하는 다른 펭귄 친구들과 예언자 러브레이스를 만난다. 러브레이스는 사이비 예언자로 권세를 누리지만 사실은 인간이 남극에 남긴 폐기물 때문에 목이 졸리는 고통을 당하는 자다. 이를 본 멈블은 외계인(인간)의 존재를 확신하고 찾아 나선다.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남극의 항구, 언덕 위의 초라한 교회와 거대한 공장의 폐허. 이 장면은 러브레이스가 사이비 종교적 지도자이면서 물질문명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멈블은 권력자의 거짓 이데올로기를 깨닫는다.
멈블은 거대한 어선을 쫓아 인간의 땅까지 간다. 수족관에 갇혔으나 한 소녀가 춤추는 재능을 알아보면서 그는 인간 세상에 화제가 된다. 멈블은 무전송신기를 등에 매달고 남극 고향에 돌아온다. 노아를 비롯한 원로들은 여전히 그를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지만, 멈블은 남극의 ‘물고기가 줄어드는 진짜 이유는 외계인 때문이며 그들은 펭귄들의 춤에 반응하며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는 체험한 진실을 전한다. 공동체의 펭귄들은 멈블을 따라 춤을 추고, 헬리콥터를 타고 인간이 나타나자 원로 지배자들도 함께 춤을 춘다. 펭귄들의 집단적인 춤은 인간 세계에 방송되며 남극의 환경파괴에 대한 논쟁이 불붙는다. “펭귄은 날 수 없는 새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펭귄 없는 세상은 싫소.”라는 주장이 대규모 환경 운동의 현장 사진과 함께 빠르게 제시된다. 결국 남극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다시 돌아왔고, 펭귄 마을은 수백만의 펭귄 무리가 번성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멈블의 춤은 해방의 언어다. 춤은 공동체 지배자의 억압에서 그 자신을 해방시켰고, 동시에 공동체 구성원들을 각성시켰다. 멈블은 마을의 낮은 곳과 동굴에서 말하고 함께 춤췄다. 노아나 러브레이스가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노래는 삶의 목적이며 펭귄신의 명령이라는 지배자의 거짓 이데올로기가 폭로되며 펭귄들은 허위의식에서 해방된다.
한편 멈블의 춤은 더 고차원의 세계에 사는 존재인 인간과 소통하는 언어이다. 이 소통은 평등한 소통이 아니다.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의사소통의 모습에 가깝다. 이것은 우리 능력의 한계를 생각하게 한다. 멈블이 경험한 인간 세계는 진실의 아주 작은 단편일 것이다. 멈블은 인간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멈블은 최선을 다해 인간과 소통을 시도했고 인간들은 그의 간절한 마음에 반응했다. 펭귄들은 식량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고 춤추며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들의 뜻을 이루었다.
멈블이 인간과 자신의 공동체를 설득한 힘은 미지의 세계와 두려움 없이 소통한 용기와 열정, 낮은 자들에게 거짓 없이 평등하게 다가가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라. 그리고 겸손하게 세상과 소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