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세상
강 훈
정글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힌다. 이는 지구에 생명체가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당연한 법칙이다. 인간세계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한다. 다만 정글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글에서는 이 법칙에 의해 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루지만, 인간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글의 약육강식은 동물들이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단순한 과정에서 나타난다. 단지 먹고 살려는 생존욕구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욕구를 넘어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법칙이다.
영화 ‘해피피트’에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주된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동물들의 사회는 인간 세계와 마찬가지다. 영화 속 동물은 인간세계의 사회적 약자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어 가고, 동물의 먹이는 인간의 미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빼앗겨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그럼에도 동물들은 힘을 합쳐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펭귄 마을의 수장 노아, 주술사 펭귄 러브레이스등 기득권 세력은 그들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거짓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멈블은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는 관습적인 규율을 지키지 못한 죄로 펭귄 마을에서 쫒겨난다. 노래를 못부르고, 경박한 춤을 춰 펭귄신의 노여움을 사 먹이가 부족해졌다는 누명까지 쓴다. 이런 누명을 씌운 노아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다.
인간이 동물에게 피해를 주고, 노아와 러브레이스가 다른 펭귄들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상대적 강자이고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펭귄들이 인간에게 어떤 저항도 못하고, 노아와 러브레이스의 뜻에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못한 것은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누명을 쓰고 펭귄마을을 떠난 멈블은 먹이 부족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세계로 향한다. 가는 길에 만난 바다 동물들은 역시 먹이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고래조차 인간의 공격으로 등에 커다란 상처가 있는 피해자다.
인간이 행한 모습, 펭귄 사회의 모습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정당화 될 순 없다. 그들은 공동체 사회다. 누군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도와주고, 반대로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사회다.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리주의적인 관념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나의 작은 양보로 누군가에게 커다란 행복을 줄 수 있다면 보람 있지 않을까?
멈블이 인간에게 잡혀 수족관에 있는 동안 자신의 특기인 탭댄스를 춘다. 멈블의 탭댄스에 관심을 가진 인간은 펭귄에 대한 연구를 하고, 무분별한 어획으로 인한 문제점이 공론화 된다. 멈블은 연구용이 되어 인간과 함께 펭귄 마을로 돌아오고, 펭귄들은 먹이 부족의 심각성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 멈블과 같이 춤을 보여준다. 멈블과 친한 한두 마리가 아니라 춤을 반대했던 노아까지 합세하여 모든 펭귄들이 춤을 춘다. 마치 시골 길거리 공연단이 물건을 팔기 위해 묘기를 보이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 춤을 지켜 본 인간은 어획량을 통제해 먹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이렇게 끝난 영화는 해피엔딩일까? 멈블이 돌아와 펭귄 사회의 일원이 되고, 먹이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해피엔딩이다. 만약 멈블이 뜻을 함께 하는 동물들을 규합하여 인간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으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만약 싸움에서 패하더라도 멈블은 영웅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제대로 된 저항 없이 춤으로 구걸했다는 점이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복종으로 보여 꼭 해피엔딩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세계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글에서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양보가 없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면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희망을 잃을 것이다. 나의 양보로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희망을 줄 수 있다. 욕심을 줄이고 모두가 행복해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려본다.